울진 역사/문화.

불영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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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영당

아산영당(鵝山影堂)은 신라시대 학자인 문창후(文昌候) 최치원(崔致遠)의 학문을 기리기 위해 1888년(고종 25)에 창건하였으며, 문창후의 유상(遺像)을 봉안하고 있다. 또한 1925년에는 구한 말의 애국지사인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의 진상(眞像)을 함께 추배(追陪)하였으며, 매년 음력 10월 10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강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지붕 기와집이며, 영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평면은 통간으로 이루어졌고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툇간을 설치하였다. 정면의 사주문(四注門)을 들어서면 강당이 보이고, 그 뒤쪽에 외삼문으로 둘러싸인 영당이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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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당

충효당(忠孝堂)은 조선 중기 울진의 효자이자 충신인 여우(汝愚) 주경안(朱景顔)을 봉안한 사당이다. 주경안의 나이 20세 때 부친이 학질(?疾: 말라리아)에 걸려 생사를 헤매자 왼쪽 약손가락(넷째 손가락)을 잘라 태운 뒤 그 가루를 술에 타 마시게 하여 병을 치료하였다. 주경안이 60세 때에는 노부(老父)가 종기로 고생하자 한겨울에 지렁이를 구해 그 즙을 발라 낫게 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축천대(祝天臺)를 만들어 7년 동안 승전을 기원하였으며,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6년 동안 시묘(侍墓)하였다. 또한 왕(王)과 비(妃)가 승하하셨을 때에도 3년 동안 상을 치르며 죽만 먹었다. 1614년에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후 삼강록(三綱錄)에 오르고 후에 영조가 사헌부지평 벼슬과 충효당이라는 시호(諡號)를 하사하였다.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팔작지붕 기와집이며, 1907년에 일본군에 의해 불태워졌으나 1927년에 중건하였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이 지은 당기(堂記)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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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송정

월송정(越松亭)은 관동팔경(關東八景)의 하나로 고려 1326년(충숙왕 13)에 존무사(存撫使) 박숙(朴淑)이 처음 지었으며, 조선 연산군 때 관찰사 박원종(朴元宗)이 중건하였다. 1969년 오랜 세월이 지나 퇴락(頹落)한 것을 재일교포들이 신축하였으나, 옛 모습과 같지 않아 해체하였다. 1980년 7월에 현재 정면 5칸, 측면 3칸의 고려양식으로 복원하였으며, 현판에는 최규하 전 대통령의 친필이 새겨져있다.월송정은 군지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시대의 네 화랑인 영랑(令郞), 술랑(述郞), 남석(南石), 안상(安祥)의 유람지였다.’한다. ‘달밤에 솔밭에서 놀았다.’고 하여 ‘월송정(月松亭)’이라 하였고 또한 ‘월국(越國)에서 소나무 묘목(苗木)을 가져다 심었다.’하여 ‘월송(越松)’이라고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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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양정

망양정(望洋亭)은 관동팔경(關東八景)의 하나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구조의 정자이며, 고려시대에 기성면 망양리 해안가에 처음 세워졌다. 1471년(성종 2)에 평해군수 채신보(蔡申保)가 현종산(縣鍾山) 남쪽 기슭으로 이전하였고, 1518년(중종 12)에는 거센 비바람에 훼손된 것을 중수하였다. 1590년(선조 23)에는 평해군수 고경조(高敬祖)가 다시 중수하였으나 허물어진 채로 오랫동안 방치되었다. 그러다가 1858년(철종 9)에 울진현령 이희호(李熙虎)가 군승(郡承) 임학영(林鶴英)과 함께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이후 일제강점기와 광복의 시기를 거치면서 주춧돌만 남은 것을 1958년에 중건하였으나 퇴락(頹落)하여 2005년 정자를 완전 해체하고 새로 건립하였다.망양정은 정자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관동팔경 가운데 으뜸이라 하여 숙종이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라는 현판을 하사하였다. 또한 정철(鄭澈)은 ‘관동별곡(關東別曲)’에서 망양정의 절경(絶景)을 노래하였고, 정선(鄭敾)은 ‘관동명승첩(關東名勝帖)’으로 망양정의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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