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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정
연호정
- 종별 향토유적
- 소재지 울진읍 연지리 797-6
정자 건물은 정면3칸, 측면 2칸의 익공양식으 팔작집으로 지면에서 약30cm 띄어 누마 루를 깔고 주위에 난간을 돌렸다. 오늘날은 시민의 소풍지, 피서객의 휴양처로서 수많 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연호의 주위는 약 2km이고, 수심은 2m정도로 잉어, 붕어, 뱀 장어 등 어족이 번식하고 옛부터 평포십리에 부용이 만발하는 연호이다.
옛날엔 호외강수에 염어선이 오르내리고, 옥계동 곡팽에 숭립한 함벽정과 그 이름을 함께 떨쳤다. 일명 고성 늪이라 함은 고대 고씨가 살던 부락이 무너져 늪이 된 까닭이 다. 근고 까지는 현 농업협동조합 뒤에서 낚시질을 하였고 군청 동측에 문향루가 있어 연향을 마시기도 하였다. 특히 8월이면 시인, 관광, 풍류객들이 화간단정에서 향기에 취하기도 한다.
정각은 순조 15년(1815)에 호심 북안산에 창건하고 향원정이라 명명하였다. 그러나 이 정자가 많은 무덤사이에 세워진 관계로 야간에는 귀곡이 있다 하여 정자놀이를 꺼 리게 되었다 한다.
1899년에 시인이자 한성순보 주필인 죽전 박영선이 울진현령으로 부임하여 향원정 놀 이 석상에서 이러한 미신적인 말을 듣고 ‘층상위정귀막진 정중인시총중인 인귀상린 하 해사연화세’이라는 시를 지어 정자에 게판하였다. 그 후 향원정은 비바람으로 무너져 1922년 7월에 군수 이기원이 향사와 더불어 구객사 와 동헌 건물을 구지에 이축하고 연호정이라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월송정
월송정
- 종별 향토유적
- 소재지 평해읍 월송리 362-2
관동팔경 중 제일 남쪽에 위치한 월송정은 팔작지붕 주심포, 고상누각으로 고려시대에 창건되었고, 조선중기 관찰사 박원종이 중건하였으나 세월이 흘러 퇴락되었던 것을 19 33년 향인 황만영 등이 다시 중건 하였다.
그후 일제말기 제2차 세계대전 중 적기(연합군)내습의 목표가 된다하여 월송주둔 일본 군에 의해 철거당하여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69년 4월 평해·기성·온정면 출신의 재일교 포로 구성된 금강회의 후원을 받아 철근 2층 콘크리트의 현대식 건물로 정자를 신축하 였으나, 옛모습을 찾을 수 없다하여 1979년 해체하고 새설계 아래 도비 8천만원으로 1 980년 7월에 옛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조선 성종이 당시 국내 명화가를 시켜『팔도의 사정(사정-활을 쏘는 활터의 정자) 중 가장 풍경이 좋은 곳을 그려오라』 명하자 그 화공이 영흥의 용흥각과 평해의 월송정 을 그려 올렸더니, 성종은『용흥각으 부용과 양류가 아름답기는 하나 월송정에 비 할 수 없다』며 월송정과 그 주변의 경치에 감탄했다 한다. 신라시대 화랑들이 이곳의 푸 른 소나무와 흰모래 밭에서 웅지를 품던 도장으로도 알려지고 있는 월송정은 숙종때 송강 정철이 이곳을 찬미한 관동팔경 중의 하나로 정자위에서 바라보는 빽빽히 우거진 노송림과 명사십리의 아름다운 바다풍경은 가히 손꼽을 만한 명승지이다.
망양정
망양정
- 종별 향토유적
- 소재지 근남면 산포리 716-1
망양정은 정면 3 ×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기와집이다. 관동팔경의 하나로 넓은 동해 를 바라보며 산 정상에 날을 듯 앉아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이 망양정은 고려 시대에 기성면 망양리 해안가에 처음 세워졌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허물어진 것을 1471년(조선 성종 2) 평해 군수 채신보가 현종산 남쪽 기슭에 옮겨 놓았 다. 1517년(조선 중종 12) 비바람으로 정자가 파손되어 다음해에 안렴사 윤희인이 평 해군수 김세우와 협의하여 중수하였고 1590년(조선 선조 23) 평해군수 고경조가 다시 중수하였으나 허물어졌다. 세월이 오래되어 방치될 때 1854년(조선 철종 5)에 울진현 령 신재원이 망양정을 이축할 것을 향회에 발문해 둔산 해안봉에 장소를 정하였으나, 재정이 부족하여 추진하지 못하다가 1860년(조선 철종 11)윤 3월 6일에, 울진현령 이희 호가 정자가 오랫동안 무너진것을 한탄하여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그 이름하였다. 그 후 정자가 퇴락되어 주춧돌만 남은 것을 1957년에 울진군 및 울진교육청의 보조금과 여러 사람들이 목재 기증으로 1958년에 중건하였다. 이후 다시 낡고 기울어진 것을 울진군에서 여러 차례 보수하여 유지해 오던것이 다시 심하게 낡아 2005년에 완전해체 하고 새로 지었다.
특히 조선 숙종임금은 관동팔경 중 망양정 경치가 최고라 하여 ‘關東第一樓(관동제일 루)’란 현판을 하사하였으며, 망양정의 절경은 읊은 유명한 시와 글로는 숙종과 정조의 어제시, 정추 김시습의 시, 정철의 「관동별곡(關東別曲)」등 다수가 전해오며, 그림으 로는 정선(鄭敾)의「백납병(百納屛)」 「관동명승첩(關東名勝帖)」에 있는 망양정 도(望洋亭圖)가 유명하다.
구장정사
구장정사
- 종별 울진군 향토문화유산
- 소재지 북면 울진북로 1821-20(신화리 140-1)
구장정사(龜藏精舍)는 전구원(田九畹)이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1650년 부모상을 당하고 난 뒤 소실(小室)을 지어 편액을 구장(龜藏)이라 하고 형, 동생과 함께 학문 토론을 한데서 비롯하여, 우암 윤시형(憂菴 尹時衡), 만은 전선(晩隱 田銑), 한재 주필대(寒齋 朱必大), 어사재 주환벽(於斯齋 朱奐璧) 등 그리고 후생들과도 함께 학문을 강토(講討)한 곳에서 유래한다.
구장정사에 향사된 전구원의 휘(諱)는 구원(九畹), 자는 정칙(正則), 호는 우와(愚窩)이고, 담양인(潭陽人) 봉예공 진(奉禮公 晉)의 8세 손이다. 1615년 취죽헌 유추(翠竹軒 有秋)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642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구장이라는 편액 하의 소실에서 형제와 향중 인사와 학문을 논하였다. 서파 오도일(西坡 吳道一)이 이곳 현령으로 와서 그를 훈장(訓長)으로 삼아 향사음례(鄕射飮禮)를 주관하게 하여 유풍(儒風)을 크게 떨치게 하였다. 오도일이 그의 원고를 베껴 경중(京中)에 가서 여러 문사에 알려지게 하였다. 1691년 77세에 생을 마쳤다. 전구원이 1691년 돌아가자 구장정사 뒤 언덕에 장사지내고, 1713년에 향중 인사들이 사우(祠宇)를 건립하여 춘추로 향사하였다. 1863년에는 만은 전선이 합사되었다. 1868년 서원 철폐령 이후 동향 선비들이 유허비를 세워 추모하였다. 『우와문집』 상,하권이 전한다.
특히 구장정사 건물은 정사(精舍)와 서당(書堂)의 용도로 사용하다가, 서당의 기능이 소멸된 후부터는 살림집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여 진다. 정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와가(瓦家) 까치구멍집이다.
구장정사는 울진지역의 지역적인 특성이 잘 나타난 온돌중심형 와가 까치구멍집으로 17세기 중반에 울진 지역에서 활동하여 유풍을 진작한 전구원이 강학하던 데에서 유래한 유적으로 울진지역 유학 학풍의 전통을 이해할 수 있는 장소로 판단되어 2012년 10월 22일 ‘울진군 향토문화유산 제1호’로 지정되었다.
후포리 신석기 유적
후포리 신석기 유적
- 종별 울진군 향토유적
- 소재지 후포면 후포리 등기산 등대
1983년 3월 26일 후포리 등기산 노인정 진입로 공사 중 장대형의 마제석부 32점 등이 발견되어 후포리 유적이 처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후포리유적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조사된 40인 이상의 시신을 집단매장한 공동묘지이며, 192점의 장대형석부와 장신구인 수식과 관옥 등이 대량 출토된 유적이다.
신석기시대에는 수렵과 채집을 위주로 하던 사회였으므로 조상이나 자연에 대하여 정신적인 의존도가 높아서 이에 대한 의례 행위가 생활의 일부였다. 자연에 대한 두려움과 생업활동의 안전, 질병, 풍요, 다산 등을 자연숭배의 믿음으로 해결하였으며, 일부 자연과 동물, 조상에 대하여 신격화하거나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러한 것으로 보았을 때 후포리유적의 집단공동무덤에서 출토된 대형석부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감, 후손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의례 및 부장품이었을 것이다.
울진 후포리유적은 우리나라 선사시대 유적 중 특이한 집단매장 무덤으로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현재 신석기시대 집단매장유적이 확인된 곳에서 남동쪽으로 약 12m 떨어진 곳에 “울진 후포리 신석기 유적관”을 지었는데, 유적관의 가운데에는 1983년 발굴조사된 유적 중 상층에서 조사된 당시 현황을 복원하여 전시하였다. 또 복원된 유적의 좌‧우로는 신석기시대의 문화상을 알 수 있도록 당시 생활상을 전시하였는데, 우측에는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사는 움집의 주거지를 3동 만들었고, 좌측에는 신석기시대인들이 돌도끼를 제작하는 모습을 재현하여 전시하였다.
- 담당부서문화관광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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