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 역사/문화.

불영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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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 문화유산 역사적인물

울진의 역사적 인물을 스토리와 함께 소개해드립니다.

간도사건의 주모자 권태상

  • 소재지 : 온정면 광품

온정면 광품 사람으로 한일합방후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에 가담하여 활약하다가 1931년 일본군의 군사시설을 폭파한 유명한 간도사건의 주모자의 한사람으로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되었다.(당시 사형자 8명중의 한사람)

남양홍씨 열녀각

  • 소재지 : 기성면 삼산리 산 72

烈女洪氏는 金源鎭의 妻로서 媤父母를 효도로 섬겼으며 남편의 병이 심하여지자 하느님께 자신이 아픔을 代身할 것을 빌며 손가락을 끊어 피를 드리니 남편이 병에서 깨어 났으나 다시 위독해져 마침내 喪을 당하자 남편을 뒤 따라 죽어 같이 묻히기를 맹세했으나 늙으신 시부모를 생각할 때 참아 죽지 못하고 다시 마음을 고쳐 媤父母 奉養에 일생을 바쳤다고 한다.

남양홍씨 효자각

  • 소재지 : 북면 부구리 산 638

孝婦 南陽洪氏는 김철중과 결혼하여 시모를 지극히 모셨으나 媤母가 늙어 병이 드셨다. 가난한 생활에 奉養할 것은 없는데 병석에 누워계신 시모는 肉味를 원하여 고심하던중 하루는 호랑이가 노루한마리를 물고 와 마당에 놓고 사라졌다. 이 노루를 잡아 侍湯했으며 그러한 일이 있은 뒤 男便이 病으로 고생함에 그 병을 알기 위하여 매일같이 남편의 변을 맛보고 藥을 투약하였으며 친가에 대를 이을 후손이 없음을 항상 걱정하여 알뜰히 재산을 모아 조상들께 香華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였다고 한다.

노원달 효자비

  • 소재지 : 울진읍 명도리 산 86

孝子 盧元達은 부친께서 여행중 死亡하니 當時 14歲의 어린 나이로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반도리까지 찾아가 屍身을 혼자서 묻고 돌아와 생각하니 고향에 안장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됨으로 3년후 다시 찾아가 1,200리 먼길을 걸어서 父親의 遺骸를 故鄕땅에 안장시킨 효자이다.

단종 복위를 꾀하던 최시창 부자

  • 소재지 : 매화면 매화2리

매화면 매화2리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정제, 세종때 삼군도 진부사를 지냈다. 단종을 쫓아내고 세조가 등극하자 벼슬을 버리고 순흥에 내려와서 단종의 숙부인 금성대군 유와 순흥부사 이보흠과 더불어 단종복위를 꾀하였다. 비밀리에 영남 선비들과 결탁하여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을 복위시킬 계획을 세웠는데 영월에 유폐된 단종을 순흥에 모셔와서 순군사와 영남선비를 동원, 조령과 죽령의 두 길을 막고 단종을 복위시킨다고 격문을 작성한 것을 순흥 관노 급창이 벽속에서 숨어 듣고 금성대군의 시녀를 매수, 격문을 훔쳐 서울로 가버렸다. 격문이 없어짐을 안 금성대군과 이보흠은 기천(지금 풍기) 현감에게 명하여 빼앗아오게 하였으나 기천 현감이 뒤?아 격문을 뺏은 후 조정에 들어가 고변하니 큰 공을 얻은 반면 금성대군, 이보흠, 최시창 부자 등 수백명이 죽었으니 그 때 순흥 앞을 흐르는 죽계물이 모두 붉어졌다 한다.

달성서씨 열녀각

  • 소재지 : 북면 부구리 산 638

烈女 達城徐氏는 장진혁의 妻로써 남편이 5년간 병에 들어 신음하고 있을 때 이를 안타깝게 여겨 이웃에 물어 보니 쉽게 구할 수 없는 약술과 뱀의 즙을 구하여 服用하면 된다는 말을 듣고 고심하다가 문 밖으로 나가 하늘을 바라보며 藥을 내려주시기를 願하니 하늘이 감동하여 매일 2~3매씩 얻게 하니 그것으로 술을 빚어 계속 복용케 하여 병이 회복되었다. 그런 뒤 또 남편이 腫氣를 앓아 死境에 이르게 되자 밤낮으로 남편의 아픔을 自己가 代身해 줄 것을 祈願하니 하늘이 感動하여 腫氣를 完快해 주었다고 한다.

담양전씨 열녀각

  • 소재지 : 매화면 금매리 산 7

烈女 潭陽田氏는 新安 朱鎭九의 妻로서 어릴 때 스스로 어버이를 至極히 공경하고 媤家에 들어서는 아내의 道理를 重히 여겨 공손하게 男便을 섬겼으며 남편의 病患이 危篤해지자 정성을 다하여 간호하였으나 불행히도 死亡하고 말았다. 그는 초상과 소상을 禮를 갖추어 치루었으며 男便과 함께 묻힐 것을 盟?하고는 먹고 마시는 것을 一切 禁하고 밤낮으로 묘 옆에서 통곡하므로 媤母께서 음식을 강제로 먹였으나 음식을 삼키지 않고 내 뱉었다. 이로 인하여 17日後에 스스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대해 황응청

  • 소재지 : 기성면 정명리

기성면 정명리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대해, 이름은 응청, 자는 청지로서 타고난 천품이 대인의 기상이며 학문과 문장에 뛰어난 사람으로 명종대왕께서 세자가 글을 배우기 시작하자 그 경사를 축하하기 위하여 과거를 보일 때 응시차 시험장에 들어가 책제를 보니 마음에 들지 않아 응시하지 아니하고 고향에 돌아와 오직 학문 연구에만 힘썼다.
1567년에 임금께서 초야에 묻힌 학자를 천거하라고 명하니 선생의 덕망이 높다는 보고를 받고 즉시 예빈사 참봉에 임명하였으나 부임치 않으니 다시 개성 연은전 참봉에 임명하니 부임 2개월만에 사표를 내고 고향에 돌아 왔다. 그 후 임진왜란 뒤라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정치는 무질서하여 이의 개선방안을 제시하니 임금께서 매우 가상히 여겨 그대로 시행하라고 이조에 명하여 시행케 하는 한편 벼슬을 주어 등용하니 진보현감이 되었다. 부임지에 부임하여 많은 공적을 남기고 2년 후에 다시 고향에 돌아와 진리를 탐구 하였다. 아계 이산해 선생이 황보에 귀양 왔을 때 매일같이 찾아와 글도 짓고 서로 존경하였다. 또한 선생은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의 생전에 공경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어머니가 돌아가심에 3년 거시할 때 매일 한번씩 집에 와 아버님을 뵈옵고 갔지만 한번도 내실에 들린 사실이 없어 효자로서 소문이 나니 1607년 선조대왕께서 이 소식을 듣고 효자각을 지으라고 은전을 베푸니 생시에 선각을 짓은 일은 전국을 통해 별로 없는 일이었다. 또한 향헌을 만들어 생활의 규범으로 하고 예도를 지키니 오늘의 이 곳 예도와 생활규범은 그때 선생이 행하던 것이 전승되어 온 것이다.

독립운동가 죽포 전영직

  • 소재지 : 죽변면 후정리 후당동

1888년 1월 27일 죽변면 후정리 후당동에서 태어났다. 1911년 소련땅에 가 계시는 부친을 1년만에 모셔온 효자이다. 1912년에 울진 헌병대장 일본인 '구야'라는 자가 죽변에 와서 지방유지를 모아 놓고 한일합방 소감이 어떠냐고 물으니 그들의 총칼 아래 억눌린 지방민들은 겁을 먹고 묵묵부답 하는데 공이 일어서서 당당하게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민족의 일원으로서 나라를 잃어 버리고 좋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과거의 역사를 보면 남의 나라를 공멸하고 그 임금을 살려둔 예는 드문데 우리의 황제 폐하는 왕궁에 모신채 우대하고 있다니 다소 안심될 뿐이다'라고 하니 처음에 눈을 부릅떴던 구야는 차츰 눈을 지긋이 감더니 '충의로운 말이다' 하고 칭찬하였다 한다.
1915년에 데라우찌 총독이 시정 5년 기념으로 서울에서 공진회를 개최하니 당시 울진군수 이택규와 더불어 20명을 인솔하여 4일간 구경하고 돌아 왔는데 그때 비원 앞에 가서 '고궁은 의구한데 주인이 바뀌었나!'하고 통곡하니 군수가 당황하여 제지하였다 한다. 1919년 3월 울진군 3.1만세 사건에 가담한 전원이 체포되어 부산형무소로 떠나던 죽변 뱃 머리에서 음식을 건너주고 인솔인 무장한 일헌에게 풀어주라는 격동을 한후 공은 장식등 애국동지들과 손잡고 울진청년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어 청년회우보를 발간하다가 출판법 위반으로 폐간당하고 동지들과 함께 경찰서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고 나와서 이를 잊지 않기 위하여 회원 일동을 이끌고 죽변 뒷산에 해송 2,000그루를 심었다. 1923년 7월에 상해임시정부 특파원 안희제에게 농우 2마리 값에 해당하는 현금 80원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희사하였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하여 대한독립 촉성회 울진지부장을 역임하면서 많은 공을 세우다가 6.25 10일전에 서울에 갔다가 인민군 정치보위부에 체포된 후 소식이 없다.

독송정 유허비

  • 소재지 : 울진읍 고성리

朱世昌 호는 獨松이요 司直幸의 子로 性品이 至極히 溫恭하여 廬墓에 매일 上食마다 匙箸소리가 쟁쟁하고 朝夕進茶하매 물길이 멀어 不便하든바 범이 墓옆에 우물을 파주었다. 朝廷에서 이 사실을 알고 아름답게 여겨 布三百匹을 償으로 주고 延日慶源義州敎授로 褒除하였다. 또한 일찌기 聾岩 李賢輔와 松江 鄭澈과 月川 趙穆와 唱酬가 있다.

동학교도 전의철

  • 소재지 : 기성면 방율

전이철은 기성면 방율 사람으로 100년전 철종때 경주 사람 수운 최제우 선생이 부르짖는 동학에 가담하여 소위 신미년란을 일으킨 사람이다. 그는 조선 말엽의 정치의 부채와 일반 서민의 생활고를 통탄한 나머지 최제우선생이 창도 한 동학에 가담하여 3년간이나 교주를 따라 다니며 동학을 퍼뜨리다가 정부에서 혹세무신의 도라 하여 탄압을 가하게 되자 고향에 돌아와 자기집에 숨어 있으면서 최제우 선생과 은밀히 연락하여 평해를 중심으로 교세 확장에 협력하였다. 이때 진주병사 백락신의 학정에 분개한 민중을 선동하여 진주민란을 일으켜 백락신을 쫓아 내는데 성공시켰다.
그리고 주동인물인 이필제가 영해에 은거하고 있음을 알고 그와 내통 하여 민중의 반란을 획책하였으며 자기집 쥣뜰에 10여명의 철공을 숨겨두고 밤낮으로 칼, 창등의 무기를 만들게 하고 동지 수백명을 운집시켜 훈련을 시켰다. 고종 8년 3월 10일 반란 준비는 완료되고 거사의 날은 다가왔다.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전의철은 백마를 타고 민병 500명을 거느리고 평해관아에 진군하여 군수를 사로 잡은 후 관아를 불지르고 영해로 쳐들어가 영해부사를 죽이고 다시 영덕으로 나아갔다. 이때 조정에서 급파한 손경준이 이끈 관군을 만나 싸우다가 크게 패하고 말았다. 그는 몸을 피하여 이필제와 함께 충청도 단양으로 피신중 조령에서 다시 반란을 꾀하다가 체포되어 사형되었다. 이후 역적으로 몰린 그 일가는 여지없이 망해 버리고 지금 그의 후손이 기성면 황보리에서 영농을 하고 있다.

강계부사 장백손

  • 소재지 : 죽변면 매정동

세종때 죽변면 후정리 매정동에서 태어나 1471(성종2년)에 사마시에 합격 하였고 1487년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그는 갑산진 병마사 밑에서 만호 벼슬을 하면서 여진족 우적합이 조산보를 점령하였다가 도원수 허종에게 쫓겨 달아나자 허종을 도와 두만강을 건너 700리를 쳐들어가 여진족을 쳐부수니 우적합은 다시 일어날 힘을 잃고 멀리 달아났다. 이 소식을 들은 임금께서 크게 잔치를 베풀어 위로와 격려를 하고 한계급 승진시켰다 또한 1495년에 삼수사, 1501년에 용려위, 1504년에 강계부사가 되었다가, 중종때는 순천부사, 원주부사, 경흥부사 등을 역임한 뒤에 1523년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통정대부가 되었다. 이때 고산성을 고읍성으로 옮길 것을 임금께 간청하여 고읍성으로 옮겼다.

몽천서원과 우암 윤시형

  • 소재지 : 매화면 매화리 윤촌

1602년 4월 16일 매화면 매화리 윤촌에서 태어 났다. 16살 때 봉왕부란 글을지어 칭찬을 받았으며 그후 수찬이란 벼슬을 지냈다.
1633년(인조11년) 계유별시에 계태자부란 글을 지어 장원하였고 45세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관시(성균관에서 선비들에게 보이는 시험)에서 강심경부를 지어 탁월한 재주를 인정 받았다. 삼남지방에 8년간 한해가 들어 백성이 도탄에 빠짐을 근심하고 임금께서 전국에 정치를 비판하는 정언을 구할 때 우암은 민생의 고충을 빠짐없이 상소하니 임금이 기뻐하여 비답하기를 '너는 초야의 선비로서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이 오직 한조각 붉은 충성에서 비롯됨을 내가 앎으로 심히 기뻐하여 마지않노라. 두 번 세 번 읽고 또 읽어 차마 놓지 못하겠노라. 정치의 잘못된 폐단은 마땅히 정부에서 명령하여 의논 후 처리하겠 노라'하시고 소문을 출판하여 전국수령방백에게 보내니 그 이름이 온 나라 안에 널리 알려졌다. 62세때 돌아가시니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매화면 금매리 몽천마을에 몽천서원을 지어 제향하였는데 한말 대원군때 폐원령에 의해 철폐되었다

무실제 남진영

  • 소재지 : 울진읍 정림리

자는 정함 호는 무실제. 1889년 12월 7일 (고종 26년) 울진읍 정림리에서 태어났다. 한말의 유학자 전간제 선생에게 수학하여 40 ∼ 50명의 유생을 배출하였다. 왜정치하에 일본의 천황 명치가 죽자 일본 형사들이 조장을 달고 슬픔에 잠기라 하니 거절하였다. 그의 저서는 주문모상록과 한은록이 있다.

문하시중 황서

  • 소재지 : 북면 부구리 산 638

기성면에서 출행하여 고려조 충열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가서 왕을 호위하여 외교에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으로 벼슬이 첨의평리, 문하시중에 이르렀다. 그는 평해현을 군으로 승격시켜 줄 것을 왕께 상소하기도 하여 왕이 그의 외교의 공을 생각하여 평해현을 군으로 승격시켜 주었다.

박한명 효자각

  • 소재지 : 온정면 덕산리 698

孝子 朴漢明은 平素 孝誠이 하늘에 닿았고 학문을 착실히 닦았다. 부모님이 눈병으로 고생하실 때 손으로 대변을 만져 病의 差度를 알아보고 아주 위급할때는 손가락을 끊어 侍湯하는 등 효행을 다하니 병이 完快되었다. 그러자 하늘이 감동되어 홰에 앉은 닭이 백색으로 변하고 묘 주변에 있는 소나무들이 누렇게 말라 죽으니 그의 精誠스러운 孝行에 하늘이 感動하였다 하여 온 주민들이 찬사하였다고 한다.

병조참판 남봉길

  • 소재지 : 울진읍 정림리

울진읍 정림리의 경무사에 모신 참판공은 당시 만호의 벼슬로 1624년 (인조2년)에 도원수 장만의 휘하에서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데 큰 공헌을 세워 진무원종 일등공신이 되었고 사후에 가선대부 병조참판 겸 의금부 오위도총 부총관으로 추증 되었다. 후에 향인이 박금동에 사우를 이룩하고 모시다가 경무사로 개칭하니 아직도 나라에서 하사한 녹권을 보관하고 있다.

부호 김기학의 자선

  • 소재지 : 근남면 산포리

조선 순조때 근남면 산포리 사람 김기학은 재산이 많고, 인심이 후하여 그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 많았다. 고종원년(1864년 4월)에 창덕궁 인정전이 소실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나라의 은혜를 입고 신하된 도리에 궁궐이 화재를 당하였는데 어찌 그냥 있을 수 있겠는가'하며 이의 중건 을 위해 울진군에 할당된 인부 350명의 비용을 부담하여 영월에 가서 목재를 베어 서울로 운반해 바쳤고, 또 그 이듬해 흉년이 들어 많은 군민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음을 보고는 전곡을 풀어 군민구호에 크게 힘썼으며, 그 해 울진군에 할당된 세금을 혼자서 다 바치니 군민 모두가 그이 높은 덕을 칭송해 마지 않았다. (순조때 가선대부 벼슬을 받음)

성종조 명신 손순효

  • 소재지 : 평해읍

1427년(세종 9년) ∼ 1497(연산군 3년) 조선 성종때 명신이며 자는 경보, 호는 물제, 칠휴거사, 시호는 문정, 본관은 평해로 어릴때부터 매우 총명하여 7세에 소학에 능통하고 1453년(단종1년)에 문과에 급제, 복시에 합격하여 병조좌랑을 거쳐 형조참의가 되었으며 도승지를 경유, 강원도 감찰사로 부임했을 때 성종이 유씨를 폐비하자, 상소를 올려 극간하였다.
대사헌 조참찬으로 있을 때 임사홍의 일로 파직되었다가 그후 경상감사, 조찬성, 판중추부사에 이르렀으며 성종의 총애를 받았다. 성종이 돌아가시자 주야로 통곡하며 1개월이나 음식을 먹지 않았다. 1546년(연산군 2년)에 70세의 나이로 사직의 뜻을 포함에 왕이 허락하지 않고 궤장을 내렸으나 다음해 71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공이 강원도 감사로 있을 때 비가 오지 않아 몹시 가뭄이 들어 오곡이 타 죽게 되자 기우제를 올렸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공은 말하기를 '지금 비가 오지 않음은 다름이 아니라 수령의 정성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만일 정성을 다한다면 하늘이 감동해서 반드시 비를 줄 것이다' 하고 몸소 목욕제계하고 하늘에 빌었더니 그날밤에 비가 왔다. 기쁨을 참을 길 없어 조복을 입은 채로 뜰에 나아가 비를 맞으며 수없이 하늘에 절을 하니 비가 더욱 쏟아졌다. 이를 본 아전이 우산을 받쳐주었다. 그러나 공은 '이렇게 반가운 비에 어찌 우산을 받는단 말이냐?'하고 우산을 물리쳤다 한다.
또한 공은 임금님 앞에서 충서의 글을 써서 정성을 다하여 아뢰니 성종이 그의 곧은 성격과 충성스러운 뜻을 헤아려 더욱 높게 기용함은 그의 솔직담백한 성격의 영향이리라.

손가락 끊은 피로 아버지를 살린 황숙

  • 소재지 : 기성면 사동

호는 귀암, 위는 숙, 자는 학이로 기성면 사동에서 태어나 승사랑,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겸 경연참찬관의 벼슬을 하였다.
8살 때 어머니를 다라 이웃집에 갔더니 그 집의 미친개가 어머니의 발뒷꿈치를 물어 피가 흐르니 어머니를 끌어안고 대성통곡함에 하늘의 감화인지 물었던 개가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또 그 후 아버지가 오랜 병환에 시달려 운명 직전에 손가락을 끊어 피를 자시게 하니 다시 회생하므로 조정에서 이를 알고 거듭 상을 주었다.

승훈랑 최사룡과 몽조

  • 소재지 : 북면 마분동

호는 몽와, 울진군 북면 마분동에서 태어나 승훈랑의 벼슬을 하였다.
당시 강원감사 이태우가 울진에 순시를 왔다가 여관에서 자는데 꿈에 용 네 마리가 구슬을 다루면서 하늘로 오르던 중 한 마리가 홀로 날아가더니 어떤 집 안방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깨어본즉 꿈이라, 이상히 생각하고 그 다음날 말을 타고 꿈길을 찾아 북쪽으로 가니 마분동에 사는 최씨 집이였다.
감사는 주인을 불러 꿈 이야기를 하고 부인이 간밤에 틀림없이 임신을 했을터이니 아들을 낳거든 나에게 연락하라고 명하였다. 과연 열달 후 부인이 아들을 낳아 이름을 사룡이라 하였으며 태어날 때 이집에서 서광이 하늘로 빚었다 한다. 선조때 사마 벼슬에 올랐고 양사언은 울진의 안자라고 매우 칭찬하였다.

심천범 부처의 효행 상신서

  • 소재지 : 북면 두천리

북면 두천리에서 태어난 심천범은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홀로 계신 아버지를 모셨다. 아버지는 일찍부터 중풍으로 기동을 못함에 천범은 어려서부터 농사일과 가사일을 돌봐야 했으며 밥도 손수 지어야 했다. 또한 아버지의 밥먹는 것, 눕는 것, 일어나는 일까지 도와 드려야 했다.
옛말에 '오래 앓는 병에 효자가 없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부자지간의 정이 두텁다한들 가난한 살림에 먹고 살기 조차 힘겨운데 하루 이틀도 아닌 50여년을 한결같이 정성을 다하니 참으로 하늘이 준 효자라 하겠다. 그의 아내 최씨는 어린 몸으로 시집와서 남편의 뜻을 잘 받들어 날마다 시아버님의 얼굴을 씻어드리고 머리를 빗겨 드리며 사흘이 멀다고 옷에 설사를 하건만은 한번도 찡그리는 법이 없이 항상 깨끗한 새 옷을 입혀 드리고 맛있는 음식으로 공양했을뿐만 아니라 농사와 길쌈을 부지런히 하여 몇 해 안가서 가산을 일으켜 궁하지 않은 살림을 하게 되었다.
시아버지는 이웃 친구들에게 말하기를 '내 며느리가 50여년을 하루같이 내 마음을 편하게 하고 기쁘게 해주니 내 무엇으로 그 은혜를 다 갚으랴?' 하면서 크게 울었다 한다. 시아버지의 나이 100세가 되고 며느리의 나이 64세가 되던 1822년 (임오년)에 전염병이 유행되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는데 마침내 시아버지도 이 병에 걸리게 되었다. 며느리는 날마다 이른 새벽에 샘물을 길러와서 제단위에 올려 놓고 '우리 시아버님은 아무 죄가 없사오니 이 몸과 죽음을 바꾸게 하여 주옵소서' 하고 수개월 빌었더니 시아버지는 원기를 회복하고 살아났다.
1823년 3월 그믐날에 또한 시아버지가 병이 들어 꿩고기를 먹었으면 좋겠다 하였다.
때는 초봄이라 꿩이 이 산 저 산에서 울기는 하지만 꿩이 새끼 치는 시기라 국법으로 잡지 못하게 되어 있으므로 하는 수 없이 집에서 기르는 개에게 말하기를 '너는 비록 짐승이나 한집에 사는 식구가 아니냐, 너가 산에 가서 꿩을 잡아 올 수 없느냐?'하였더니 개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즉시 산속으로 달려가 꿩 한 마리를 잡아 오므로 꿩고기 요리를 하여 드렸더니 맛있게 잡수시고 그날 즉시 병이 완치되었다. 그 후 몇 달이 지나 100세의 나이로 시아버지는 세상을 떠나니 두 부부는 3년동안 묘에 살며 애통해 하니 마을 사람들이 감동해마지 않았다. 그후 두 부부의 효심이 고을에 퍼지자 향노 주명환외 26명의 이름으로 효행 상신서를 순리사를 통해 조선 고종 임금께 아뢰니 1928년에 동몽교관을 증하고 정여를 명하여 북면 두천리에 효자각을 세우다.

강릉부사 주의

  • 소재지 : 울진읍 명도리 상가동

孝1474년(성종5년) 울진읍 명도리 상가동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죽제 자는 휘문이라 하였다.
18세때 사마시에 합격하고 31세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는 경주훈도, 가평.풍기.밀양군수를 거쳐 늙어서 일본에 두 번, 명나라에 한번 서장관으로 다녀왔다. 중종 임금께서 여러번 수고가 많았다 하여 강릉부사로 임명하니 이때가 64세라 [이제는 늙어서 맡은 소임을 다할 수 없으니 벼슬을 거두어 주소서] 하고 상소를 올렸으나 임금님께서 [일을 아래 사람에게 맡기고 누워서 다스리라] 하였다.
공은 할 수 없이 부임하여 24개월의 임기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오니 이때가 중종36년이었다 고향에 들어와 거문고를 타고 시를 읊으며 편안히 생활을 하다가 1546년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안응준.영양남씨 효열각

  • 소재지 : 기성면 정명리 산 26

孝子 安應俊은 7세의 어린 나이로 母親의 病이 심해지자 無名指를 끊어 피를 드렸으나 효험이 없자 다섯 손가락을 끊어 피를 드리니 그 역시 효험도 없이 실신하시자 어머니 옆에 꿇어 앉아 밤을 세우니 다음날 아침에 回生하셨다. 그 후 조금 떨어진 이웃마을에 분가하여 살면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어머님에게 문안을 드렸다고 한다.

애국자 곽종목

  • 소재지 : 근남면 구산리

1886년 (고종23년) 근남면 구산리에서 태어난 곡종목은 매화만흥학교를 졸업한 후 영해의 송천의숙에서 교편생활을 하다가 한일합방이 되자 가족들을 데리고 만주로 건너가 서간도 유하현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교포학교를 설립하고 후배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뿐말 아니라 그는 중국말을 잘하여 중국인과의 교섭에 앞장서기도 했으며 고국동포들의 서간도 정착에 힘썼다.
1994년 제 1 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본의 침략적 야욕은 더욱 노골화 되고 마침내 그들은 1916. 9. 23. 새벽에 민족의 정신을 심어주는 만주의 교포학교를 습격하여 불태우고 부근 한국인을 무차별 학살하니 이때 곽선생 또한 이국땅 만주에서 광복의 한을 풀지 못한 채 31 세의 젊은 나이로 학살 당하였다.

애국자 진규환

  • 소재지 : 근남면 노음리

근남면 노음리 사람으로 백운 주진수 선생이 매화에 만흥학교를 설립할 때 많은 돈을 희사하여 물심양면으로 많이 도왔으며 독립군에 가담하여 군정 일을 보는 한편 학교를 설립, 후배를 양성하였으며 서간도로 이민간 울진 사람들의 정착지를 마련하는 노고가 많았으며 그 뒤에 고려혁명당 사건으로 신의주 감옥에서 옥살이를 하였다. 옥고를 치르고 나온 뒤에도 계속 독립군을 지원하였으나 광복의 기쁨을 맞지 못한 채 이역땅 만주 길림에서 한많은 일생을 마쳤다.

애국지사 국오 황만영 선생

  • 소재지 : 기성면 사동리

조선 고종조 독립운동가로서 호는 국오이며 1857년 6월 20일 기성면 사동리에서 태어났다.
어릴때부터 도량이 넓고 의리가 강하였으며 한학 및 병서를 읽고 연구하던중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의분을 참지 못하고 항일 구국운동에 참여하여 의병장 현오우에게 사재 800냥을 희사하였으며 1907년에는 사재를 털어 기성면 사동리에 대흥학교를 설립하여 지방의 젊은이를 모아 개화사상과 민족정신을 일깨우는데 힘썼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의 비보는 2천만 동포에게 통한의 분노를 가져 왔으니 선생이 심혈을 기울여 운영해 오던 대흥학교가 배일사상의 온상이라 하여 매화만흥학교와 더불어 폐쇄되는 비통을 겪어야만 하였다. 1911년 항일 애국지사들의 의견이 왜인이 손이 덜 미치는 서북간도 지방을 중심으로 독립군을 양성하고 두만강 건너편에 새 나라 건설을 하자는데 모아지자 황만영 선생은 간도 이민정책의 실현에 적극 참여하여 이 고장의 주민 100여 세대를 이주 정착시켜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노력하였다.
그 후 후진 양성의 꿈이 사라지지 아니하여 1912년 서간도 유하현에서 성제 이시현 선생을 도와 신흥학교 설립을 위한 재정지원에 심혈을 기울려 왔으며 1913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재 시베리아 대한민국회의에 서간도 대표로 참석하여 애국지사 문창범등과 손잡고 항일구국의 활동을 계속하였다. 식민지 통치 10년의 한 맺힌 민족의 절규가 1919년 3월 1일 온 강토에 울려퍼질 때 선생은 만주의 용정땅에서 불철주야 민족정신의 계몽과 전도로 민족 독립운동을 뿌리 내리는데 결정적인 힘이 되었다.
1919년 4월 17일 상해 임시정부의 자금 조달책을 맡아 밀양사람 유필한을 국내에 파견시켜 소기의 임무를 수행케 하였으며 안동사람 이상용이 국무령으로 기용될 때 재정 책임을 맡게 되었으며 그 후 교통부 차장에까지 내정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내의 파벌적 대립은 선생으로 하여금 울분과 실망만을 안겨 주었다. 선생은 애통한 마음에 혈서로서 민족적 단결을 호소하는 편지를 국내외 독립운동가에게 발송하였으니 명예와 사사로운 이해를 떠난 선생의 애국충정을 어찌 잊어리오. 귀향 후 1927년 3월 15일 국내의 애국단체인 신간회에 참여하여 울진 지부장으로 활동하다가 1939년 3월 7일 조국광복을 보지 못한 채 66세의 나이로 망국의 한을 안고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선생이 가신지 37년이 지난 1976년 12월 12일 지방유지와 일가들이 뜻을 모아 월송정 입구에 추모 기념비를 세웠다.

애국지사 백운 주진수

  • 소재지 : 죽변면 후정리 매정동

1878년 7월 11일 죽변면 후정리 매정동에서 태어났다.
어릴때부터 도량이 넓고 재주가 있어 학문이 남보다 뛰어났고 또한 정의감이 강하여 불의를 보고는 참지 못하는 성품이었다 한다.
청년시기에 한학 공부에 힘쓰는 한편 서울에서 발간된 지리, 역사, 수학 등 신문학공부에도 힘을 썼으며 독립신문, 황성일보, 매일신문등을 받아 보면서 나라가 위태롭고 국제정세가 미묘하게 돌아감을 느끼고 오직 구국이념에 불타 한 목숨 바칠 것을 결심하고 서울로 올라갔다. 때는 병인양요·신미양요·운양호사건·임오군란·갑신정변·을유년 거문도사건·갑오년 동학란·청일전쟁· 명성황후 시해 등 매우 국내가 어수선하고 어지러워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졌을 뿐만 아니라 강대국들이 서로 이권을 놓고 다투고 일본은 청일전쟁에 승리한 후 본격적으로 침략의 마수를 한반도에 뻗채고 있어 우리나라의 운명이 바람앞에 등불처럼 위태로운 시기였다. 이러한 때 서울로 올라간 주백운 선생은 임범호, 이상재 선생을 비롯하여 수많은 애국지사와 친분을 맺었다.
먼저 남궁억 선생이 조직한 관동학회에 가담하고 서재필 박사가 영도하는 독립협회에 들어가 열렬한 활동을 전개했고 청산유수같은 그의 열변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을사보호조약이 맺어지자 관동학회 회원들과 의논하고 고향에 돌아와 1907년 10월에 매화에 만흥학교를 설립하고, 인문과 측량과로 나누어 인재를 양성 하였다. 뿐만 아니라 사동의 황만영으로 하여금 사동대흥학교를 설립케 하고 영주학교, 안동화산학교, 영해송청학교 등 학교 설립에 많은 협조를 해서 수많은 인재를 양성 하였으나 한일합방으로 인해 폐쇄되고 말았다.
1909년 나라가 망하기 직전에 미국으로부터 돌아온 안창호 선생을 중심으로 전기덕, 양기택, 윤치호 김구, 주진수 등이 서울에 모여 비밀 독립운동단체인 신민회를 조직하여 주진수 선생은 강원도의 책임자가 되었다. 이렇게 대표자가 된 후 최후의 일각까지 결사적으로 싸울 것을 맹새하고 구체적인 항쟁계획을 세웠다. 뿐만 아니라 김구, 양기택, 윤치호 등과 결합하여 400여명의 애국 청년들을 모아 극비밀리에 지도 훈련시켰다.
그러나 한편으로 일진회 회장 이용구와 만고 역적 이완용은 일인의 앞잡이가 되어 1910년 8월 29일 조선 500년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부끄러운 한일합방에 동조하고 말았다 이날 서울 양기택 선생댁에 모인 백운 주진수 선생을 비롯한 김구, 이동령, 이승훈 등 신민회 간부들은 땅을 치고 통곡하였다.
백운 선생은 '이제 나라가 망했다 해서 통곡이나 하고 탄식할 때가 아니다. 일인들이 총독부를 설치하고 각도에 총감을 두어 다스리도록 하는 한편 만주 간도에 이민을 시키고 만주 용정을 서울로 정하여 새 나라를 세우고 무관학교를 세워 광복군을 양성하자'고 주장하여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리 하여 각 도에 책임대표를 정하고 백운 선생은 강원도 대표가 되어 각 군을 돌아다니며 서간도에 이민갈 사람을 모집하니 울진에서만도 100여호가 이민가게 되었고 강원도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이민하였다. 이 사실이 탄로되어 데라우찌 일본총독은 경무총감을 시켜 전국의 애국지사를 검거하니 이것이 105인 사건이다. 이때 백운 선생도 김구, 이승훈과 같이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옥살이를 하였다. 옥살이 후 또다시 만주로 건너가 이시영 선생이 뜻한 바에 따라 서간도 봉천성 통하연 할리하에서 신흥학교를 세우는데 노력하였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주병웅, 전오규, 이동휘 등과 같이 노서아땅 블라디보스톰으로 이주하여 교포들과 규합 대한민국 의회 해삼위, 기사단, 지인단, 애국부인회, 소년애국단 등을 조직하여 조국광복운동을 활발히 전개 하였다. 그 후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제창의 소식을 듣고 만주로 돌아와 동포를 규합하여 3월 13일 5,000여명의 시위군중을 이끌고 만주 용정에서 대대적인 독립운동을 일으켰다.
이 운동은 기미년 독립운동의 찬란한 한페이지를 장식하였다. 그 후 김좌진, 이범석 장군의 청산리 싸움에서 참모로 활약하여 왜병 17명을 사살하였다. 1925년 양기택과 손잡고 고려혁명당을 조직 끊임없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1936년 9월 16일 59세를 일기로 광복의 기쁨도 보지 못한 채 한많은 일생을 마쳤다. 광복후 백운 주진수 선생의 거룩한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59년 3월 1일 울진국민학교 입구에 기념비를 세웠다.

애국지사 주병웅

  • 소재지 : 죽변면 후정리 매정동

주병웅은 죽변면 후정리 매정동 사람이다.
매화만흥학교를 졸업한 후 만주에 가서 독립군에 가담하여 국경지방에서 일본헌병을 쏘아 죽이고 길림에서 3.1 운동에 가담하여 선두에 나서서 만세를 불렀다.뒤에 대동단에 가입하여 무기를 가지고 서울에 잠입하여 총독을 죽이려 하다가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8년형을 받고 복역중 옥사 하였다. 1958년 국가공훈단장을 받고 그의 유해는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열녀 장범곡

  • 소재지 : 죽변면 화성리

孝죽변면 화성리에서 태어나 18살에 곽종목에게 출가하였다.
원래 천성이 온화하며 강직하여 가난한 살림에도 길쌈을 하여 모은 돈으로 가사를 알뜰히 보살폈으며 시부모를 극진히 봉양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일합방후 부군 곽종목이 조국 광복운동을 위하여 서간도 유하현 구산자로 이주하자 부군을 따라 갔으나 곽종목은 31세에 일병과 싸워 전사하고 말았다. 그 후 부인은 남편의 유골을 고향땅에 안장하기 위하여 3,000여리의 험한 길을 반은 걷고, 반은 차편으로 만고 고생 끝에 울진에 당도하여 선영묘지하에 안장하고 3년의 예를 극진히 하였다. 애국지사의 부인으로서 부도정절을 완수한 공으로 1960년 3월 1일 울진교육감으로부터 열녀상을 받았으며 그 후 문교부장관상도 받았다.

열녀 효녀 조낭자의 모녀

  • 소재지 : 온정면 덕인리

조낭자의 어머니는 17세에 온정면 덕인리 조명룡과 결혼하여 1남3녀의 어머니로서 행복한 생활로 나날을 보냈다. 그런데 사랑하던 남편이 갑자기 병석에 눕게 되자 좋다는 약과 좋다는 비법을 다 하였으나 병이 낫지를 않았다. 날이면 날마다 새벽 첫닭이 울기전에 맑은 물을 떠 놓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으나 아무런 효과없이 운명 직전에 이르게 되었다. 부인은 왼쪽 손가락을 짤라 그 피를 남편의 입에 넣으니 부군이 되살아 났다. 또한 조명룡의 셋째딸은 어머니를 본받아 효성이 지극하였다. 16세때 어머니가 병이 들어 눕게 되자 손가락을 끊어 헌혈하고 10일간 기도하며 대신 죽기를 기원하니 어머니 병세가 차차 완쾌하여졌다. 당시 평해군수가 임금님께 상주하여 많은 상을 받고 효녀각을 지으니 지금까지 현존하는 온정면 덕인리 덕거리에 있는 효녀각이 그것이다.

영릉 의병대장 김현규의 죽음

  • 소재지 : 금강송면 불영사

을사보호조약이 맺어진 1905년 11월경 강원도 의병 총참모장 이강년의 휘하 의병대장 김현규는 이강년의 지시에 따라 강원도 남부를 책임지고 봉화 권용하, 공주 유용택, 정선 남필언 등과 함께 금강송면 불영사를 중심으로 의병을 모집하였다.
불영사를 의병의 임시사령부겸 의병훈련소로 정하고 맹훈련을 하였다. 그리고 군량미 6백석 (봉화 장재산 1백석, 울진 읍남 윤참봉 2백석, 불영사 주지 운경대사 3백석 기증) 을 확보 하였는데 아장 주락조가 임의로 군량미를 부당유출할 뿐만 아니라 파벌을 조성하여 통수체계를 어지럽히고 주민들을 괴롭히므로 주의를 주었으나 듣지 아니하는데다 조사 결과 군량미가 부정 유출됨을 알고 아장 주락조를 감금하고 며칠 후에 처형하기로 하였는데 이것을 알아차린 주락조가 옥문지기 최인석을 매수하여 큰방 윗목에 담뱃대를 물고 졸고 있는 김장군을 문 틈으로 총을 쏘아 넘어뜨리니 아까운 청년 장군은 민족의 한을 품은 채 유명을 달리하였다. 그 후 주락조가 스스로 대장이 되어 일본 장수에게 아부하고 생명을 구하니 이 어찌 한심하다 아니하리오! 김장군의 묘는 금강송면 하원리 윗하원 건너 마을 위쪽 도로변에 있다

영해박씨·조낭자 열효각

  • 소재지 : 온정면 덕인리 산 65

曺娘子의 母親은 17歲에 溫井面 德仁里의 曺命龍과 결혼하여 1男 3女의 어머니로서 행복한 生活로 나날을 보냈다. 그런데 사랑하던 男便이 갑자기 病席에 눕게되자 좋다는 약과 비법을 다 썼으나 病이 낫지 않았다. 날이면 날마다 새벽 첫 닭이 울기전에 맑은 물을 떠놓고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으나 아무런 효험없이 運命직전에 이르게 되자 부인은 왼쪽 손가락을 짤라 피를 男便입에 넣으니 되살아났다. 또한 曺命龍의 셋째딸 曺娘子는 어머니를 닮아서 孝誠이 至極하였다. 16세때에 母親께서 病席에 눕게 되자 손가락을 끊어 피를 드리고 10일간 기도하며 代身 죽기를 願하니 어머니의 病이 차차 完快되셨다. 當時 平海군수가 朝廷에 알려 많은 賞을 받게 되었다.

격암 남사고

  • 소재지 : 근남면 수곡리 누금동

이름은 사고, 호는 격암, 자는 경원으로서 1509년에 근남면 수곡리 누금동 지금의 성황당 터에서 태어났다. 어릴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하고 성품이 곧고 의지가 강해 하고 싶은 일은 기어코 해내는 성품이었다. 그는 과거를 보아 벼슬을 얻어 국가와 사회에 봉사하려 하였으나 과거에 매번 낙방하고 말았다. 그러나 늙어서 울진 현령의 추천을 받아 사직단참봉, 관상감 천문교수를 역임하였고 후세 사람들이 '해동강절공'이라 불러 추모하였다. 그는 기성면 정명리의 대해 황응청 선생과 어릴 때부터 친하였는데 하루는 두 사람이 같이 길을 걷다가 길가에 패도가 떨어져 있는 것을 앞서가던 격암이 보고도 줍지 않았다고 하니 그의 결벽한 성품을 알 수 있다. 과거에 낙방한 뒤부터 매일같이 주천대와 남수산에 오르며 권세와 돈으로 사람을 뽑는 과거제도를 한탄하다가 뜻을 바꾸어 천문지리의 현현묘묘한 이치와 복술 연구에 힘을 기울였다.
하루는 밤에 별을 보고 깊이 탄식하므로 옆에 있던 사람이 그 사유를 물으니 '오늘 밤 이 시각에 일본서 영웅이 태어났는데 이 아이가 자라서 반드시 우리나라에 쳐들어와 무수한 백성을 괴롭히게 될 것이니 걱정이다'라 하므로 그 옆에 듣고 있던 사람이 이상하게 여겨 연월일과 시간을 적어 두었더니 과연 그 뒤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풍신수길의 생년월일이 그 날과 똑같았다 한다.
명종 때 서울에서 사직단참봉을 할 때의 일이다. 중종대왕의 계비 문정황후 윤씨는 중 보우를 깊이 신임하므로 보우의 횡포가 날로 심하여 조정에서 걱정하고 있었는데 격암은 '걱정마시오. 내년에는 문정황후께서 돌아 가시고, 중 보우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오' 하더니 과연 예언대로 되고 말았다. 또한 동, 서의 당파싸움이 일어날 무렵 격암은 이조판서 권이서를 찾아가 '대감, 큰일났습니다. 장차 큰병이 발생해서 수백 년동안 전염될 것입니다. 그 병의 증세를 말하자면 안으로 썩는 것은 내종같고, 허는 것은 당창같고, 온 몸에 퍼지는 것은 여주나역같고, 아픈 것은 치통같고, 더러운 것은 치질같고, 정신없는 것은 간질같고 파리 모여드는 것은 눈병같고, 뒷골 아픈 것은 임질 같습니다' 하고 고하니 권판서는 '어떻게 아시오?'하고 물었다.
격암이 말하기를 '그것은 우리나라의 운명입니다. 서울의 동쪽에는 낙봉이 있고 서쪽에는 안현이 있어 서로 다투는 형세이므로 반드시 동인과 서인의 당파싸움이 생길 것인데 낙은 각마이므로 동인은 반드시 분영한 뒤에 각림할것이고 안은 혁이안이니 서인은 반드시 개혁한 뒤에라야 편안할 것입니다' 라고 예언한 것이 틀림없이 맞아 들었다. 또 하루는 사직단재택에서 손님과 마주 앉아 '자네 저기 좀 보게. 오색이 영롱하고 이상한 기운이 감돌고 있지 않는가? 저기가 덕흥군 저택인데 앞으로 성인이 나실 징조 일세'라고 하더니 그 당시 생각조차 못했던 덕흥 군 셋째 아들인 선조대왕이 되었다. 또한 박록이란 친구와 소백산에 올라 동쪽을 바라보고 깜짝놀라면서 하는 말이 '저기 동남쪽을 보게. 이상한 기운이 감돌고 있지 않은가? 저것은 임진년이나 계사년에 왜구가 쳐들어와 크게 난리를 일으킬 징조이네. 그런데 만약 임진년에 난리가 일어나면 다시 나라를 구할 도리가 있지만 계사년에 일어나면 다시 구할 도리가 없으니 큰일이 아닌가?' 하니 박록은 '그렇다면 어디로 피난을 가면 살겠는가?' 하고 물으니 '풍기와 영주가 피난처이네마는 그 전에 자네와 나는 이미 없을걸세'라고 하니 그 예언이 과연 적중하였다. 또 하루는 관상감 이번신이 자기가 죽을 날이 가까웠다고 하길래 격암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죽을 사람은 따로 있소'라고 하였으나 이번신은 재상가들을 일일이 찾아 다니면 하직 인사를 하고 있을 무렵 그 태사성의 빛이 영영 사라지자 격암선생은 돌아 가시고 말았다. 이때가 1571년 2월 3일(63세)이다. 묘선 1편과 과시 461편이 남아 있다.

울진장씨 열녀각

  • 소재지 : 죽변면 화성리 67-1

烈女 蔚珍張氏는 의병대장 주호의 처로서, 남편이 倭兵과 戰鬪중 왜병의 총탄에 맞아 쓰러지니 시신을 안고 통곡할 때 그 미모에 탐을 낸 倭兵이 그의 젖가슴을 더듬으니 그는 품에 숨겼던 칼로 젖을 끊어 땅에 팽개치고 큰소리로 호통하고는 그 자리에 순절한 烈女라고 한다.

의병 중장군 최경호(일명 응선)

  • 소재지 : 죽변면 후정리

시인 최재봉의 아들로 호는 청운이며 죽변면 후정리에서 태어났다. 뛰어난 용모와 장력으로 뭇사람의 존경을 받아 오던 중 구한국 시대에는 하사관으로 군대에 들어 갔고 을사보호조약 뒤에는 의병 중장군으로서 원주 진위대와 합력하여 울진 주둔 왜병을 물리쳤으며 한일합방 후에는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을 조직하여 왜경과 수차 싸웠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러시아의 동청철도 수비의 책임자가 되었으며 그 후 계속 항일운동을 하던중 노일전쟁때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하니 아들 동준이 대를 이어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의병장 김응선

  • 소재지 : 기성면

기성사람으로서 아우 응남과 함께 약 100여명을 이끌고 1636년의 병자호란때 침입한 청나라 군대를 무찌르기 위하여 서울로 진군하다가 도중에서 인조대왕이 청태종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하루종일 통곡하다가 의병을 풀어 고향으로 돌려 보내고 '나라 위해 한목숨 바치려고 했는데 살아서 돌아가니 면목이 없구나'라는 시 한수를 짓고 고향에 돌아와 누구 한사람도 대하지 않고 지내다가 영원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고 한다.

의병장 주호

  • 소재지 : 울진읍 고성리 구만동

문벌과 명망이 높은 가문에 태어난 주호는 임진왜란을 당해 가족을 이끌고 금강송면 소광리에 있는 안일왕 산성으로 피신했으나 일가 친척이 왜병들에게 무참히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의분을 참지 못하여 분연히 일어나게 된 것이다.
또한 그는 고을 백성들이 하루 이틀도 아닌 수많은 날을 일인들의 손에 살인과 방화 그리고 약탈을 당하는데 보고만 있겠는가? 피끓는 젊은이로서 내 한몸 보존하기 위하여 대의를 저버리고 있단 말인가? 하고 외치며 향토수호의 기치를 높이 들고 숨어 있던 안일왕 산성을 박차고 집으로 돌아와 울진현의 소재지로서 현정을 베풀던 고산성을 중심으로 의병을 모집하였다.
당시 피난갔던 현령을 비롯한 벼슬아치와 지방유지들이 주호 장군을 태산같이 믿고 상하가 한덩어리가 되어 총력전을 수행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300여명의 의병을 얻게된 주호는 성벽을 수축하고 맹훈련을 시켰다. 그 해 8월말에 왜병들은 남무묘법연화경이라는 주문을 쓴 깃발을 앞세우고 들어왔다. 주호 장군은 왜적을 맞아 수십일간 치열한 격전을 벌인 끝에 성안에는 양식과 물이 떨어지고 화살이 하나도 없어 돌을 던지고 바위를 굴렸으나 성을 포위한 왜병에게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육박전으로 최후의 일각까지 피를 흘리며 싸우다 한사람도 남김없이 모두 호국의 화신이 되었다.
주호 장군의 부인 장씨는 본시 자색이 아름다웠다. 부군이 전사하자 그 시체를 껴안고 울다보니 왜병이 몰려와서 젊고 아름다운 부인을 껴안고 젖가슴을 만지는지라 부인이 대노하여 껴안은 손을 깨물고 품속에 지녔던 칼을 꺼내어 더럽혀진 젖가슴을 잘라 땅바닥에 던지면서 '이 예의도 모르는 짐승같은 놈들. 우리가 무슨 잘못이 있기에 이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느냐?'하고 꾸짖으며 피를 흘리다 죽으니 왜병들도 서로 쳐다보며 그 굳센 정절에 탄복하였다 한다. 왜병 가운데 의리를 아는자가 있어 이사실을 나무 푯말에 써서 여러 시체 가운데 세워두고 갔는데 피난민들에게 확인되어 비로서 알게 되었다.
7년 전란이 끝난 뒤 1603년(선조 36년)에 임금께서 아시고 주호에게 봉열대부사재감첨정이란 벼슬을 주셨고 장씨 부인에게는 영인이라는 벼슬을 주었다.

남양홍씨 효자각

  • 소재지 : 북면 부구리 산 638

孝婦 南陽洪氏는 김철중과 결혼하여 시모를 지극히 모셨으나 媤母가 늙어 병이 드셨다. 가난한 생활에 奉養할 것은 없는데 병석에 누워계신 시모는 肉味를 원하여 고심하던중 하루는 호랑이가 노루한마리를 물고 와 마당에 놓고 사라졌다. 이 노루를 잡아 侍湯했으며 그러한 일이 있은 뒤 男便이 病으로 고생함에 그 병을 알기 위하여 매일같이 남편의 변을 맛보고 藥을 투약하였으며 친가에 대를 이을 후손이 없음을 항상 걱정하여 알뜰히 재산을 모아 조상들께 香華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였다고 한다.

이 윤 효자각

  • 소재지 : 평해읍 월송리 산 49

효자 李潤은 어머님의 病患이 심하여 다리의 살을 베어 藥에 타서 끓여 드리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시게 하여 수개월 동안 더 살게 되었다. 또 父親이 病患으로 계실 때 그 아픔을 자기가 代身할 것을 하늘에 빌고는 열손가락을 잘라 피를 부친께 드리니 얼마동안 더 살게 되었으나 결국 돌아가시자 삼년을 묘옆에 움막을 짓고서 시묘하면서 짚신 한 켤레로 三年喪을 마쳤다. 그 후 이분이 사시던 동네를 孝子坊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가동 효자각

  • 소재지 : 매화면 신흥리 산 67-1

효자 李佳東은 부모님께 지극한 효도를 다 하였으며 부모님께서 병환으로 계실 때 얼음속의 고기와 눈속의 죽순을 구하여 侍湯하였고 후에 상을 당하니 너무 슬퍼서 몸이 수축되고도 喪禮를 갖추기를 道가 넘을 정도로 하였으며 묘옆에 움막을 지어 3년간 시묘하였다. 이 고을 현령께서 그 소문을 듣고 많은 賞을 내리고 孝子閣을 建立케 하였다.

임진왜란 군수 정담

  • 소재지 : 기성면 사동

정담은 기성면 사동 사람으로서 자는 징경이다.
선조 8년에 알성무과에 장원급제하였고 선조 10년에는 무관으로서 함흥부에 배속되었는데 그 이듬해에 경원, 종성 등지에서 호적 니탕개가 2,000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오니 정담은 '적이 한치의 땅이라도 침범함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인즉 내 마땅히 조국을 위해 한목숨 바쳐 싸우리라'하고 감사에게 지원해서 500명의 군졸을 이끌고 나가 용감히 싸워 적장 니탕개를 사로잡고 800명을 사살해서 크나큰 무공을 세웠다. 선조 23년에는 전라도 김제군수로 임명되어 어진 정사를 베풀어 군민의 칭송을 받았고 청백한 원님으로 이름이 널리 퍼졌다. 2년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일대가 불과 수일만에 수라장이 되어 함락되니 정담은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말하기를 '죄 없는 백성이 도둑의 발아래 짓밟히고 있다. 내 사내대장부로 태어나 태연히 보고만 있을까 보냐?'하면서 동분서주하여 의병을 모았다.
이리하여 모집한 의병을 이끌고 웅령에 나아가 금산을 거쳐 전주를 점령하려고 올라오는 왜군을 맞아 2일간 용감히 싸웠으나 수부족으로 이겨낼 도리가 없었다. 지원부대도 없고 군량미마저 떨어지고 전사자는 시시각각으로 불어나니 보다 못한 정담군수는 웃옷을 벗어 자기성명을 적어 자신이 전사한 후에도 시체를 분별할 수 있게 한뒤에 말위에 올라 앉아 큰 칼 빼어들고 부하들에게 이르기를 '나와 같이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 사람은 남아 있고, 나라가 망하던 말던 자기 한 목숨 살기만 바라는 자는 곧 물러가라'하니 충의로운 정담군수의 위국충정에 부하장정 300여명은 한사람도 빠짐없이 일제히 싸우자는 환호성을 높이 지르며 적진으로 풍화와 같이 돌진하니 육박전이 일어나 최후의 결전 끝에 수부족으로 모두 장렬한 호국의 화신이 되고 말았다.
적장 시마쓰 요시히로도 참으로 감탄하여 '우리도 나라를 위해 싸우지만 조선국에 이러한 충의로운 신하가 있을 줄은 몰랐다'하면서 죽은 정담의 시체를 한없이 굽어보며 그 충절에 경의를 표하면서 부하에게 명령하여 조조선국충의담이라는 표목을 써서 세우게 하였다. 정담군수의 웅령싸움이야말로 진정 임란사를 장식하는 빛나는 전투의 하나로서 난후에 우의정 이항복이 여러 장수들의 논공행상을 할 때 웅령대전장병의 공을 제일로 했다하니 그 공을 가히 짐작할만 하다.

임진왜란과 해월 황여일

  • 소재지 : 기성면 사동리

조선 문신인 해월 황여일은 1556년 10월 21일 기성면 사동리에서 태어났으며 휘는 여일, 자는 회원 호는 해월이라 하였다. 1569년에 간성에서 진사시험이 있어 가는 길에 삼척 죽서루에 올라 시 한수를 읊었는데 당시 삼척 부사 양사언이 감탄 하였으며 이 시험에 장원급제하였다. 1585년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예문과 검열과, 춘추관 기사관, 승문원 부정, 회룡 전사관을 거친 후 선조대왕의 어명으로 호당(왕립도서관)에서 근무 하였다. 1589년 입시야강(임금님의 개인교수)에 임하였고 1590년 10월에 정은신과 이일 및 신립 장군과 함께 선조의 왕명에 의해 궁중의 선정전에서 국방에 관하여 논의하게 되었다.
1592년 4월에 함경도 고산 찰방에 임명된 며칠뒤에 임진왜란(1592년 4월 13일)이 일어나 부임하자 곧 함경감사에게 왜병과의 임전계획을 협의하였으나 유영입이 말을 듣지 아니하여 결국 함흥이 함락되니 세상은 무법천지가 되고 말았다. 이때 선생은 개유문을 써서 방을 부치고 치안 유지에 힘썼다. 그 후 조정에서는 윤탁연을 함경감사로 임명하고 해월은 종사관이 되었다. 종사관으로서 군병모집, 군량미 조달 등 선무공작을 하던중 회령의 관속 국경인이 반역하여 많은 관군을 죽이고 두 왕자와 신하들을 사로잡다. 적장 가등청정에게 투항하니 선생도 같이 포로가 되었다가 그 해 7월에 두 왕자와 함께 석방되었다. 석방 즉시 삼수사 윤경로와 의논하여 왜적을 물리칠 계획을 수립하던 중 함훙의 토호 진대유 부자가 왜적에 투항하고 그 앞잡이가 되어 백성을 괴롭힘에 잡아다가 죽이고, 그 해 10월에 윤경로와 함께 함훙을 공략하여 주야 3일동안 악전 고투 끝에 왜적을 50리 밖으로 물리쳤다.
1593년 그 공으로 형조정랑에 특진되었다. 이때 영의정 유성룡이 명장이여송에게 명군의 횡포가 심하므로 이를 금해줄 것을 건의하다가 봉변만 당하고 돌아온 후 해월을 강산 금단관에 임명하고 해월에게 지시하기를 공은 의주에 가서 명군과 작당하여 백성을 괴롭힌 소통사를 샅샅이 조사하여 목베이도록 하니 그는 소임을 다하여 이의 폐단을 없앴다. 이 해 8월 선조대왕을 모시고 환도한 후 명장 이전종을 찾아가 화전법을 배워 유성룡에게 보고하여 그 보급에 힘썼다.
1594년 9월에 도원수 권율 장군의 종사관으로 행주대첩에 절대적인 공을 세워 임란사를 빛나게 하였으므로 국가 2등공신이 되었고 1595년 4월에 권율 장군을 따라 진주싸움에 참전 하여 또한 큰 공을 세웠으며 이순신 장군과 여러차례 만나 국사를 의논하고 작전을 협의하 였다. (난중일기 참조) 1598년 명나라에 비변사(정사 이항복, 부사 이정구.서장관.황여일)로 갔을 때에 이태리사람 [마테오리치]의 감수를 받아 손수 제작한 세계지도는 현재 숭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동양 유일품이다. 그 후 조천록을 지었으며 1623년 4월 2일 67세 로 영민하시니 가선대부.이조참판 겸 동지. 경연의 금부.성균관사.홍문관제학.예문관제학.세자좌 부빈객 등의 벼슬을 추증하였다.

장동유 효자각

  • 소재지 : 울진읍 고성리 375

孝子 張東維는 天性이 매우 두드러지게 뛰어 나셨으며 어린시절에는 경치를 좋아하고 커서는 讀書를 좋아하여 致庵 朱命杞선생의 가르침을 받고 河洛性理學設을 터득, 易學을 해석하였으며, 養母喪을 당하여 묘옆에 움막을 지어 3년간 시묘하니 깊은 산중에 묘가 있었으므로 식수를 얻기 위하여 샘을 파기도 하였다. 그 후 朱命杞선생이 홀로 계실 때 그가 손수 밥을 지어서 수십년을 봉양하였다고 한다.

장서린 효자각

  • 소재지 : 울진읍 고성리 370-1

孝子 張瑞麟은 어린시절에 父親喪을 당하여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3년간 밥대신 죽으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어머님에게도 至極한 孝道를 다하면서 가끔 外出하였을때에는 밤중이라도 반드시 귀가하였는데 때로는 범을 타고 온다는 기이한 일이 있고 갑자기 어머니의 病患이 위독하여 손가락을 끊어 피를 드시게 하니 3年을 더 延壽하셨으나 얼마후 어머님 喪을 禮法에 따라 모셨다고 하여 이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효자각을 건립케 하였다.

공양왕을 복위 시키려던 최복하

  • 소재지 : 북면 무령현 마분동

고려 정종때 문과에 급제하여 한성판윤을 거쳐 보문각 직제학과 대사간을 지낸 사람이다. 이성계의 위하도 회군과 왕권침범으로 비행이 잦아 이를 못마땅히 여기는 동시 고려의 운명이 멀지 않았음을 알고 벼슬을 버리고 북면 무령현 마분동에 와서 숨어살 때 이구가 이를 알고 권기시까지 보내어 나라일을 같이 하고자 꾀하였으나 듣지 않고 있던 중 고려의 마지막 임금 공양왕이 삼척군 근던면 고돌재에 유폐되자 분함을 참지 못하여 고려조 장군 장천영과 임제 그리고 태학생 전생등과 협의하여 울진 삼척에서 수천명의 동지를 규합 혁명코자 하였으나 사전에 탄로되어 이성계의 아들 태종의 손에 죽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조정에서는 울진을 반역지역으로 지적하고 과거를 울진인에게 못보게 하여 출세의 길을 막았다. 그러나 세종대왕께서는 한나라 안에 이방 아닌 이방지역을 둔다는 것은 옳지 않다 하여 다른 군과 같은 대우를 하도록 하였다.

전병모·술모 효자각

  • 소재지 : 평해읍 월송리 431-2

全炳模·術模 두 형제는 한마음 한뜻으로 父母님을 極盡히 奉養하였다. 父母가 病으로 계실 때 病의 차도를 가름하기 위하여 대변을 맛보고, 위독하실 때 손가락을 끊어 피를 드리어 잡수시게 하여 延命케 하였다. 그리고 부모상을 당하여는 비바람을 무릅쓰고 묘 옆에 움막을 지어 孝誠을 다하면서 시묘살이를 하였던 분이라 한다.

전택오 효자각

  • 소재지 : 울진읍 호월리 산 142

孝子 田宅五는 7歲에 父親喪을 당하여 禮節을 갖추기로 成人과 같이 하고 어머님을 至極한 精誠으로 섬기고 또 어머님께서 病患으로 계실 때 그의 妻 金氏와 함께 7일간 밤낮으로 북두칠성을 보며 공을 들여 빌었더니 하늘도 무심치 않아 病이 낳게 되었고 그후 또 어머님께서 불치의 病으로 앓고 계실 때 患部를 입으로 빨아서 낳게 하니 이 行蹟이 조정에 알려져 고종께서 童蒙敎官이라는 벼슬을 내리시고 孝子閣을 건립케 하였다.

조천록과 천군기를 지은 승지 황중윤

  • 소재지 : 기성면 사동리

호는 동명, 위는 중윤, 자는 동광으로서 1577년 5월 7일 해월여일의 맏아들로 기성면 사동리에 태어났다.
160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1612년 통정대부 승정원 조부승지, 지제교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의 벼슬을 하였으며 1620년에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한문소설 천군기를 지었다.

남양홍씨 효자각

  • 소재지 : 북면 부구리 산 638

孝婦 南陽洪氏는 김철중과 결혼하여 시모를 지극히 모셨으나 媤母가 늙어 병이 드셨다. 가난한 생활에 奉養할 것은 없는데 병석에 누워계신 시모는 肉味를 원하여 고심하던중 하루는 호랑이가 노루한마리를 물고 와 마당에 놓고 사라졌다. 이 노루를 잡아 侍湯했으며 그러한 일이 있은 뒤 男便이 病으로 고생함에 그 병을 알기 위하여 매일같이 남편의 변을 맛보고 藥을 투약하였으며 친가에 대를 이을 후손이 없음을 항상 걱정하여 알뜰히 재산을 모아 조상들께 香華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였다고 한다.

주경안 효자각

  • 소재지 : 울진읍 고성리 370-1

孝子 朱景顔은 壬辰倭亂때에 구만동 산봉우리에 祝天台란 祭壇을 쌓아놓고 밤마다 첫 새벽에 올라가 “무지한 창생이 亂중에 고생이 많사오니 하루빨리 亂을 거두어 주소서”하고 하늘에 빌기를 수년동안 하였다. 그리고 父親(주세홍)께서 病患으로 수년간 고생하시다가 사경에 이르자 손가락을 끊어 피를 술에 타서 잡수시게 하니 病이 完快되었다. 또한 그 뒤 부친께서 종기로 오랫동안 고생하시니 의원의 말이 지렁이 외즙이 仙藥이라고 하니 冬至섣달 추운 겨울밤에 어느 산밑에 가서 焚香후 기도를 하고 땅을 파니 지렁이가 나왔다. 그것으로 즙을 짜 종기에 바르니 신통하게 나았다. 그후 兩親 부모께서 별세하니 6年間 시묘살이 하였다고 하며 또한 그의 충성이 지극하여 文定王后 仁順王后 仁懿王后 宣祖大王께서 돌아가셨을 때 각 3年間씩 服制하였다 그의 행적이 三綱錄에 收錄되고 후에 英組께서 司憲府侍平을 贈職하고 忠孝堂이란 호를 내리셨다고 한다.

주명기 효자각

  • 소재지 : 근남면 행곡리 672

孝子 朱命杞는 어린시절 母親을 여의고 父親을 孝誠으로 받들었으며, 부친께서 전신마비가 되었을 때 항상 곁을 떠나지 않고 起動하시는 일이나 음식을 드시게 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父親 老病에는 “붕어죽”이 좋다는 말을 듣고 추운 겨울에 두꺼운 얼음을 깨어서 그곳에 그물을 놓아 붕어를 잡아 매일 끓여 드렸으나 그래도 낳지 않고 더욱 심하여 지자 계속 두 손가락을 끊어 죽을 써 侍湯하니 完快되었다. 그후 喪을 당하여서는 묘옆에 움막을 지어 學問에 전념하였으며 河圖洛書를 통달하여 그림과 점으로써 河圖洛書의 뜻을 표현했으며 특히, 선비촌에서 장원을 하여 賞을 받았으며 司憲府 監祭 벼슬을 지냈다고 한다.

철학자 윤사진

  • 소재지 : 매화면 매화리 윤촌

1713년 3월 22일 매화면 매화리 윤촌에서 삼족당 윤여룡의 손자로 태어났다.
호를 황림이라 하고 30세가 넘어서 인생과 우주에 대한 깊은 철리를 알아 내려고 리와 기에 대한 연구를 하다가 마침내 천하만물이 모두 하락도수에 벗어나지 않음을 알고 추구한지 5∼6년만에 그 투명한 철리를 깨닫고 관물음 한편을 지었다.
하락이수로 중용을 주해하여 통서연의와 사칠변론, 화극도설, 심리설등의 철학서를 저술하고 당시 우리나라의 사상계를 지배하던 서화담선생의 이기설에 대하여 낱낱이 분석한 뒤 부당함을 주장하였다. 공이 80세에 돌아가신 후 그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하여 매화면 금매리의 몽천서원에 배향하였다.
그의 유필은 불영사 법당의 '대웅보전'이라 쓴 현판의 글씨가 남아 있다

청태종을 암살 하려던 장대룡

  • 소재지 : 울진읍 호월리

울진읍 호월리 사람으로 인조때 훈련원 판관 및 안주 방어사를 지냈다.
병자호란때 남한산성 삼전도에서 인조대왕이 청태종에게 항복하고 세자와 삼학사가 볼모로 잡혀갔다는 말을 듣고 분함을 참지 못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불영사의 스님 개남과 의논하고 심양에 가서 청태종을 암살하여 나라의 원수를 갚겠다고 마음속 깊이 결심하여 1639년(인조 17년)에 승복으로 변장하여 심양(청나라 수도)으로 들어가 청태종 궁중화약고에 불을 지러고 재빨리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스스로 불에 타죽었다. 그는 모사전에 일행했던 스님 개남에게 자기의 속옷을 벗어 주면서 하는 말이 '나는 살아서 돌아올 수 없으니 내가 죽거든 이 옷을 가족에게 전해 달라'하였다. 장대룡의 무덤은 울진읍 정림리 사리곡 동쪽 왼쪽 기슭에 있고 묘를 의관장을 할 때 인근 수령들이 참석하였다. 스님 개남의 무덤은 장대룡의 묘 밑에 있으며 이 무덤을 개남총 이라 한다.

체찰사 황중랑

  • 소재지 : 기성면 사동

기성면 사동에서 해월 황여일의 둘째 아들로 1631년 11월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체찰사로 임명되어 장만 장군과 같이 청천강에서 오랑캐를 맞아 종일토록 역전고투하여 많은 전과를 올리다가 마침내 전사하고 말았다.

충효당 주경안

  • 소재지 : 울진읍 고성리

울진읍 고성리에서 태어난 주경안은 임진왜란때에 구만동 산봉우리에 축천대란 제단을 만들어 놓고 밤마다 첫 새벽에 올라가 '무지한 창생이 난중에 고생이 많사오니 하루 빨리 이난을 거두어 주소서' 하고 하늘에 빌기를 수년동안 하였다.
그의 아버지(참봉 주세홍)가 병이 들어 수년간 신음하다가 죽을 경지에 이르게 되자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술에 타서 먹이니 병이 완쾌되었다. 또한 그 뒤에 아버님께서 종기로 오랫동안 고생하니 의원의 말이 지렁이 즙이 신효하다 하기에 동지 섣달 추운 겨울 밤에 어느 산밑에 가서 분향후 기도를 올리고 땅을 파헤치니 지렁이가 나왔다. 그 즙을 짜서 종기에 바르니 신통하게 나았다. 그후 양친 부모가 세상을 떠나니 6년간을 하루같이 시묘하였다.
또한 그의 충성이 지극하여 문정왕후, 인순왕후, 명종왕후, 인의왕후, 선조대왕이 돌아가심에 각 3년간 복제 하였다. 그의 충효가 삼강록에 오르고 후에 영조대왕께서 사헌지평 이라는 벼슬을 내리고 충효당이란 호를 하사하셨다.

판서 장량수와 황패

  • 소재지 : 울진읍 고성리

울진 장씨의 낙향 시조 장말익의 후손으로 1205년(고려희종원년)에 진사과 병과에 급제하여 추밀원부사, 전리판서, 상호군위등의 벼슬을 지낸 분으로서 나라에 많은 공적을 남겼다. 그때 임금이 내린 급제패지는 현재까지 알려진 우리나라의 교지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서 국보 제181호로 지정되었으며, 울진읍 고성리 월계서원내의 국보각에 보관되어있다. 조선 영조때 판서공 장량수의 16대손 되는 장태항이란 분이 하루는 밤에 꿈을 꾸었는데 판서공이 조복을 입은 채 나타나서 하는 말이 '내 황패를 시급히 다른 곳으로 옮기라' 하거늘 비록 꿈일망정 이상히 생각하고 그날 새벽에 다른 곳으로 옮겼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옮기고 난 즉시 마을에 불이 일어나 삽시간에 온 마을이 불바다가 되어 집 한 채도 남김없이 모두 타버렸으나 그 황패를 모신 집만은 화재를 면했다고 한다.

관동창의군 중장군 전세호

  • 소재지 : 북면 신화리 화동

1882년 9월 27일 북면 신화리 화동에서 전석홍의 5대 독자로 태어났다. 조모의 지극한 정성으로 자랐으나 장군이 13세때 조모가 세상을 떠나시니 천애고아로 매화리에 있는 일가에서 기식을 하게 되었다. 1905년 11월경 23세 때에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음을 듣고 신돌석과 이하현을 찾아 김매정, 주락조, 최경호, 김용욱, 장진수, 전배근, 박병율등 동지들과 손잡고 창의에 가담, 강원도 의병 총잠모장 이강년의 휘하에서 중장군이 되었다. 그리고 금강송면 불영사를 임시 의병사령부 및 훈련소로 정하고 그 해 12월 20일 의병 500명과 군량미 600석을 확보하여 맹훈련하던 중 아장 주락조가 대장 김현규를 사살함에 거사를 이루지 못하고 해산하고 말았다. 그 후 신돌석 장군은 전세호를 참모겸 도선봉에 임하고 영양군 일월면에서 일본군 80명과 치열한 격전을 하다가 일본군 100여명과 불을 튀기는 싸움 끝에 서로 10여명의 전사자를 냈었고 의병 김상태, 한난삼등 4명이 포로가 되기도 하였으나 일본군을 추격하여 청하에서 1개대대를 섬멸하고 감옥에 갇힌 의병 4명을 구출했다.
그 후 다시 평해를 거쳐 울진으로 진군하니 울진군수 윤우영은 관군 20명을 이끌고 금강송면 십이령재로 도피하면서 무기고를 그냥 두고 달아났기에 파직되기도 하였다. 또한 노일전쟁때 노서아해병이 동해바다 싸움에서 파손되어 30여명이 삼척군 원덕면 월천리에 상륙하였는데 그때 그들이 가지고 있던 무기를 삼척군수 정운석이 갖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것을 얻을 생각으로 가던 도중 임원에서 들으니 장호 분토리에 일본 해군 500여명이 어부를 가장하여 해삼잡이를 하고 있다고 있다.
이 정보의 확실성을 파악하기 위하여 전세호는 자신이 분토리에 가서 알아보던중 누구인가 일본군에게 고발하여 일본군 100명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그는 포위망을 뚫고 나가길 고민하다가 모내기 하는 농민들곁에 숨어들어 모내기를 하고있는데 추격하던 일본군이 '의병한놈이 이리 왔는데 못 보았느냐'고 하니 이구동성으로 못보았다고 하여 가버리고 그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신돌석 장군과 휘하부대를 정비하여 삼척으로 향하니 삼척군수 정운석은 기세에 눌려 부하직원을 거느리고 오분리까지 출영하여 아첨을 떨었다. 군수는 노서아 무기 철연발총 세자루와 권총 세자루, 군도 세자루를 내놓으면서 생명만 살려 달라고 애걸하였다. 그래서 군수를 살려 주었더니 군수는 그 은혜를 저버리고 그날밤 암암리에 묵호에 주둔중인 원주진위대 1개대대를 이끌고 와서 습격하니 배은망덕한 군수의 행위에 모두 이를 갈았다. 삼척 오십천 가에 있는 농촌에서 불의의 습격을 받아 사방으로 흩어지고 여기서 신돌석 장군은 영남으로 갔으며 전세호 중장군은 영동지방을 맡아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100여명의 의병을 거느린 전세호 장군은 독립부대를 이끌고 황지를 경유하여 영양, 석포에서 부대 조직을 개편하였다.
그 후 그는 봉화군을 점령하였으나 영월 녹봉에서 크게 참패를 당하였다. 참패후 성익현을 대장으로 관동차의군을 재조직하여 평해를 비롯한 영동각지에서 의병활동을 하다가 서울로 피신하여 이시영, 김창숙등 애국지사의 지도를 받다가 1908년에 고향에 돌아와 매화만흥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던 중 2년후 한일합방과 더불어 폐교됨에 북면 부구리로 이사하여 86세를 일기로 한 많은 일생을 마쳤다.

한 병사의 죽음

  • 소재지 : 울진읍

1907년 8월 한국군 해산령에 의거 무장해제를 당한 장병들은 울분을 금하지 못하여 자결을 하는등 일제의 강압에 항거하였는데 이때 원주 진위대장 민긍호 외 150여명의 장병들은 미리 이러한 정보를 입수하여 무장해제를 당하기 전에 봉화, 울진 등지를 거점으로 일본군과 대처하면서 그해 9월 울진 출신 최경호 하사관의 안내로 십이령을 넘어 울진에 잠입하여 울진군청을 포위하여 망향대를 지휘본부로 한 민대장의 명령에 따라 일제히 공격하니 일본군은 군청 담방 안에서 응사하므로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
이때 의분에 넘친 충성스런 한 병사가 담장을 뛰어 넘어 그들의 배후에서 사격하다가 장렬히 전사하여 호국의 화신이 되었다. 이 싸움에서 일본군은 죽변으로 도주하다가 일본 순사부장 염원영태랑은 사살되고 한국 순검 최모도 많은 부상을 당했으며 당시 군수서리 장병하는 대삿갓을 쓰고 연호정 숲속에 숨었다가 다음날 현내에서 어선을 타고 포항으로 도주 하였다. 울진 읍민들은 민대장의 울진 점령을 환영하는 축하 군연을 베풀고 전사한 병사(이름을 알 수 없고 다만 성은 한씨임) 오로실에 안장 하였는데 그 무덤이 아직도 남아 있다.

해운당 남계명의 의분

  • 소재지 : 죽변면 화성리

중랑장 영번의 손자로 효성이 지극하고 25세에 진사가 되었다. 점필제 김종직과 교분이 두터웠으며 성종조에 이천교수로 계실 때 요승학조가 국모의 은총을 업고 갖은 횡포를 자행함에 이를 상소하였드니 왕이 한유천재후 유일남계명이라는 비답을 내리셨다. 죽변면 화성리 상현사에 중랑장과 격암과 함께 모시고 있다.

호랑이 중장군 장진두

  • 소재지 : 북면 고목리 지장골

1857년 10월 12일 북면 고목리 지장골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체격이 크고 동작이 민첩하여 장사의 기풍이 있었다. 때는 청일전쟁이 끝난 뒤 일본의 세력이 물밀 듯이 들어와 명성황후 민비를 시해하고 내정간섭을 하기 시작하여 양력을 사용하라, 상투를 깎아라, 색옷을 입어라 하고 듣지도 보지도 못하던 새로운 정령을 연발하니 이에 분노해서 경향각지에서는 의병이 일어나 일본 세력을 몰아내고 나라를 구하여야 한다고 아우성 치던 때에 울진에서도 의병을 일으켜 유진소를 설치하고 주병헌을 유진장으로 추대하여 항일운동을 전개 하였다.
1882년 음력 정월초에 일본 어선 5척이 우리나라 관원의 허가도 없이 임의로 죽변항에 들어와 해삼잡이를 하고 있었다. 유진장의 명을 받은 중장군 최재린이 포병 50명을 데리고 죽변 대밭속에서 복병하고 있을 때 북풍이 몹시 불어 일본 어부들은 해삼잡이를 중지하고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배를 물가에 당겨 올리고 있었다. 숨어있던 포병들은 5척의 배가운데 3척이 상륙되는 것을 보고 일제히 사격을 가하여 31명의 왜인을 사살하였다. 의병에 가담한 장진두는 25세의 젊은 나이로 이 싸움에서 가장 민첩하고 용감하게 잘 싸우므로 보는 이들은 경탄해마지 않았다. 장진두는 이 싸움에서 무공을 날리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어 27세의 젊은 나이로 중장군이 되었다. 그런데 그 때 다 죽은 줄만 알았던 일본인 가운데 한명이 배속에 숨어 있다가 밤중에 도주하여 부산에 있는 일본 군함에 보고하니 20여일이 지난 정월 30일에 일본 군함 1척이 죽변 앞바다에 와서 함포사격을 가하면서 수개의 소대병력을 상륙시켜 무차별 살인과 방화로 수라장을 이루었다.
이 사건을 소위 울진의 병신년왜란 이라한다.
그들은 묻어둔 일인의 시체를 파내어 목욕까지 시키고 사진을 찍은 후 군함에 싣고 가면서 어떻게 알았는지 장진두 의병이 일본 사람을 가장 많이 죽였다 하여 원수로 생각하고 일인 5명이 한국인 통역을 앞세워 고목리 장진두 집을 찾아오니 숨어있던 장진두는 산으로 피신하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묻거던 못보았다'하라고 당부하고는 산에 올라가 나무하는 마을 사람들과 옷을 바꾸어 입고 나무꾼으로 가장하여 가던 길을 도로 내려 오다가 일본군인을 만나 그중 한놈을 때려 눕히고 총과 실탄을 빼앗아 사격을 가하니 눈깜짝할 사이에 왜병이 모두 쓰러지고 말았다. 그 후 강원도 의병대장 이강연 장군 휘하에서 중장군이 되어 일본 헌병과 일본의 앞잡이로 역적행위를 하는 한국사람을 샅샅이 찾아 죽이니, 별명이 '호랑이 중장군' 이라고 하였다 한다. 그는 계속 의병활동을 하다가 삼척군 하장면 산미원에서 일본군과의 치열한 전투에서 39세를 일기로 전사하였다.

황 연 효자각

  • 소재지 : 평해읍 오곡리 산 24

孝子 黃 衍은 9세때 어머님께서 병환이 위독하시자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 드시게 하여 병을 치료한 일이 있으며 그 뒤 또다시 중환으로 신음하시니 백방으로 약을 구하던중 어머님께서 노루고기를 원하심에 하늘에 공들여 빌었드니 하늘이 感動하여 百里나 떨어진 釗磨山에서 범이 노루 한 마리를 물어다 주었다.

황성일 추모비

  • 소재지 : 매화면 기양리

公의 子는 基賢이요 號는 海隱이라 參奉誠의 后로 壽職으로 通政이니 天性이 至孝하야 親病에 氷魚를 求하는데 感天이 있었고 廬墓六年에 한결같이 하니 官營과 繡依에 儒林이 呈狀하여 褒美하니 三綱錄에 記錄되었다.

효자 백순목과 박씨부인

  • 소재지 : 기성면 이평리

효자 백형원의 3대손이며 회진의 아들로 1896년 기성면 이평리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 회진공이 나이 40으로 불행하게도 중풍이 들어 전신불수의 몸이 되고 말았다. 백효자 가정에는 이때부터 우환과 시련이 시작되었다. 아버지께서 생명은 있으나 반송장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효성이 남달리 지극한 순목 부부는 아버지의 병간호에 밤낮으로 온갖 정성을 다하였으나, 고치기 어려운 병이라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그는 아버지의 병에 좋다는 약이 있으면 품팔이를 해가면서 약을 구하여 드렸으며 이름난 의사를 찾아 수천리를 돌아다니기도 하였다. 아버지의 병간호에 전념한 부부는 하루에도 수십차례 용변을 받아내는 어려움을 감당하였으니 그 정성을 누가 일일이 형언할 수 있겠는가만은 그들 부부는 항상 웃는 낯으로 봉양하였다.
그렇게 지내오던 어느날 아버지께서 비둘기 고기를 원하시니 때는 엄동설한이라 북풍이 몰아치는 산과 들을 헤메며 비둘기를 찾았으나 한 마리의 비둘기도 발견하지 못하여 하늘을 향해 울며 빌었다. 그러던 중 이상하게도 어느날 갑자가 비둘기 한 마리가 방안으로 날아 들어와 푸드덕 거리고 있었다 그들 부부는 이 비둘기를 잡아 아버지의 원을 풀어 드렸으며 또한 병에 시달린 아버지의 건강을 위해 여러 가지 가축을 사육하여 손수 잡아서 대접하고 간호하기를 30년이나 효도 하였다. 그 후 문중에서는 두 내외의 높고 거룩한 행적을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기성면 이평리에 효행각을 세우려 하였으나 재정이 허락지 않아 효행각은 세우지 못했으나 그의 효행은 영원히 전하고 있다.

효자 백형원

  • 소재지 : 기성면 이평리 심수동

1805년 (순조5년) 기성면 이평리 심수동에서 태어났으며 고려조 명신 충간공 백순보 선생의 11대 손이다. 산수가 수려하고 풍치가 아름다운 고요한 산속의 마을 심수동에서 태어난 그는 일찍이 아버지와 형을 여의고 어머니 장씨 부인의 정성어린 보살핌을 받으며 홀로 쓸쓸히 자라났다. 차츰 나이가 들면서 어머님에 대한 효성이 뛰어나 마을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그의 생활 모두가 효의 실천으로 행하였으니 그는 해마다 엄동설한이 되면 어머님 방에 들어가 방안이 따뜻한가를 하루에도 여러번 확인 하였으며 추운 겨울에 어머님의 건강을 위해 얼음을 깨고 물고기를 잡아다가 고깃국으로 입맛을 돋우는 한편 항상 웃음으로 마음 편하게 모시니 집안이 평화롭기만 하였다.어느해 겨울 어머니께서 뜻하지 아니한 병이 들어 날이 갈수록 병세가 더욱 심했다. 여러방면으로 약을 구하며 병간호에 다섯달동안 정성을 다하였으나 효과가 없게 되자 그는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며 '차라리 이 몸이 죽고 어머님의 병이 낳게 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를 올리다 보니 날이 밝아오는 것을 몰랐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그토록 악화 되기만 하던 어머님의 병세는 하늘이 도우심인지 차차 좋아져서 소생하게 되었다.
이는 그의 지극한 효심에 하늘이 감복하였던 것이리라. 어머니는 천수를 다하고는 세상을 떠났으나 그의 애통함은 동민의 심금을 울렸으며 무덤 옆에 초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3년동안 하며 애곡소리 끊어지지 않으니 그의 지극한 효심은 온마을 사람을 감동 시켰다. 2009-03-05어머님의 생전과 죽은 후에 그 효성이 널리 알려져 1894년 (고종31년)에 현령의 추천으로 임금님이 알게 되어 사헌부 지평의 벼슬을 받게 되니 향중에서 1901년 10월 23일 효자각을 지어 그를 추앙하고 있다.

김석하 효자각

  • 소재지 : 북면 덕구리 76-2

孝子 金碩河는 모친께서 病患으로 고생하고 계심을 항상 안타깝게 생각하여 精誠껏 간호하던중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西쪽으로 50里 가면 名藥이 있을 것이다”고 現夢하자 눈을 헤치고 그곳을 찾아가 1주일을 기도하였더니 꿩이 길을 인도함으로 따라서 산을 하나 넘어서니 죽은지 얼마되지 않은 돼지가 있기에 그 돼지의 열을 구하여 侍湯하니 병이 낳게 되고 長壽하셨다 한다.

김언륜 장군과 분투골 싸움

  • 소재지 : 북면 고목리 지장골

1565년(명종20년) 북면 고목리 지장골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동네 지장서제에서 한문수학을 하고 틈만 있으면 병서 읽기를 좋아하였다. 장군의 나이가 27세 되던 해(1592) 조선조 선조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이듬해 계사년(1593) 8월에 울진에서는 고읍성 싸움과 덕천리 분투골 싸움이 가장 치열하였다. 계사년(1593) 8월에 왜군이 울산에 상륙한 북상군 수천명이 고읍성을 처들어 오고 강릉에 상륙한 왜적이 남하하여 이 고장에 침입하므로 장군은 고목리 가치산 소나무 가지마다 야등을 밝히고 동남향으로 푸른막을 치는등 이병으로 위장케하고 장유대서 망을 보며 덕천앞 호반에 작은 배를 띄어 놓고 기묘한 전법을 썼다. 장군은 남하하던 왜군을 덕천리 벌이개에 몰아 넣고 번개같은 '쇠도리개'로 적을 공격하니 아군들도 용기를 내어 접전 3일만에 적의 사체는 산과 같이 쌓여 졌다. 한편 고읍성에서 읍성을 지키던 주호 장군을 물리친 왜병은 덕천으로 진격함에 장군은 들어 오는 적과 싸우게 되나 복배수적이라 아군의 원병은 줄어들고 병기가 열세하여 장군은 적군 의 유탄에 맞아 분투골에서 전사하였다. 이 싸움에서 쌍방의 병사의 사체가 산적되었으니 임란사에 있어 고읍성 싸움과 분투골 싸움이 영동 지방의 최대의 격전지라 하겠다.
오늘날 김언륜 장군의 불러지는 이름으로는 '쇠도리개' 장군이라 하고 출생지인 뒷산을 가치산. 놀 던곳 장유대와 격전지를 벌인 벌이개. 전사한 분투골 등 지명이 있고 유적으로는 문헌에 나타난 바로는 조선조 경종때 진사 백시승의 유고에 김언륜 장군은 죽이고 사로잡아 전공은 컸으나 상은 내리지 않았다 라고 기록이 남아 있다. 분투골 전투에서 김언륜 장군은 28세의 젊은 나이로 장열하게 돌아가시니 이곳 역전 분투했던 이 골짜기를 분투골이라 불러지고 병사가 수없이 죽어 묻혔다하여 동명을 만분이라 하다가 마분동이라 불러지고 있다.

김재희 정효각

  • 소재지 : 금강송면 왕피리 641

孝子 金在禧는 어릴 때부터 어머님께서 病患에 계시어 고기와 과실을 얻으면 먼저 먹지 않았으며 生母와 養母는 물론 父親에게 至誠으로 효도를 하였으며 養母死亡시에는 생모와 다름없이 상례를 치루었고 부모상에는 너무 슬퍼서 몸이 수축되어도 喪禮의 도를 넘어 서기까지 하였으며 묘옆에 움막을 짓고 시묘하던 중에는 무서운 짐승도 感動하여 그의 말을 따랐으며 늙어서도 항상 묘 옆에서 떠날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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